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무 덴노 (문단 편집) === [[덴지 덴노]]의 즉위와 황태제 책봉 === 사이메이 덴노가 붕어한 뒤, 나카노오오에는 즉위식을 행하지 않고 칭제의 형식으로 통치했다. 덴지 3년(664년) 2월 9일에, 오오아마는 형 나카노오오에의 명으로 '''관위 26계제'''를 시행했고, 우지카미(氏上, 씨상)을 인정하며, 민부(民部)와 가부(家部)를 정하는 것을 군신에게 선포했다. 덴지 6년(667년) 2월 27일에 간신히 사이메이 덴노의 장례의식이 치뤄졌는데, 하시히토노 히메미코(間人皇女)가 사이메이 덴노와 합장되었고, 오오타노 히메미코가 그 능 앞에 묻혔다. '''모두 오오아마 황자에게는 어머니, 누나(혹은 여동생) 그리고 아내에 해당하는 이들이었다.''' 7년(668년) 1월 7일, 나카노오오에는 비로소 즉위식을 거행했다. 《일본서기》 권28 <덴무 천황 즉위전기>에는 이때 오오아마가 동궁이 되었다고 기록했으나, 같은 책의 권27 <덴지키>(天智紀)에는 이 기록이 없다. <덴지키> 안에서 오오아마는 '대황제'(大皇弟), '동궁태황제'(東宮太皇弟), '동궁'(東宮) 등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본서기]]》는 '''진신(임신)의 난''' 이전부터 오오아마를 '천황'으로 적는 등, 그의 지위에 관해서는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기록대로 오오아마가 처음부터 황태자의 지위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대황제' 등의 단어는 진신의 난으로 정권을 찬탈한 덴무 덴노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식으로 실제로는 그러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설, 단순한 존칭일 뿐 황위 계승 예정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설 등, 오오아마의 황태자 책봉 사실을 의심하는 설도 유력하다. 그가 황위 계승자로 인정되고 있었는가 어쨌는가의 문제를 떠나, 일단 덴지 덴노의 조정에서 그가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좋았던 것 같지도 않다. [[후지와라]]씨(藤原氏)의 집안 전승인 《등씨가전》(藤氏家傳)에 보면, 어느 날 궁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취기로 형왕(兄王)에 대한 감정이 격해진 오오아마가 '''장창을 가져다 덴지 덴노가 보는 앞에서 상판(床板)에 내리꽂았으며''' 이에 '''격노한 덴지 덴노가 그를 죽이려는''' 것을 내대신(內大臣)이었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만류로 무사했다고 전한다. 이 일은 덴지 7년(668년)의 일로 추측되고 있다. 덴지 10년(671년) 1월 2일, 덴지 덴노는 아들 [[고분 덴노|오오토모노미코]](大友皇子)를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임명하고, 좌대신(左大臣) · 우대신(右大臣)과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보좌로 붙였다(《[[해동제국기]]》). [[태정대신]]은 국정을 총람하는 관직으로서 그 직무는 이미 오오아마가 해온 일들과도 겹치는 것이었다. 《[[일본서기]]》는 이 직후에 "동궁태황제가 관위 · 법도를 시행시켰다."고 적었지만, "어떤 책에 이르기로는"(或本云) 하고 운을 떼며 오오토모가 이것을 했다고 주석을 붙이고 있다. 또한 《회풍조》(懐風藻)는 오오토모가 덴지 10년에 황태자가 되었다고 적었다. 일본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주석으로 달린 "어떤 책" 쪽을 택하거나, 이 기사를 덴지 3년([[664년]]) 2월 9일의 관위 26층제의 중출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오오토모 황자의 [[태정대신]] 임명과 더불어 오오아마는 조정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소외된 것으로 보인다. 오오토모가 태정대신으로서 오오아마의 직무를 행하게 된 것은 오오토모 황자에게 황위를 잇게 하려는 덴지 덴노의 의도가 강하게 표출된 것이라는 데에는 반론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